러너스 하이란 무엇인가

러너스 하이란 무엇인가

뇌속 마약이 당신을 달리게 만든다

달리기를 즐기다 보면 처음에는 숨이 차고 힘들다가도 사점(dead point)를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뿐해진다. 더 나아가 시공간을 초월하고 박진감을 느끼며 희열감을 느껴 자신의 몸이 날아갈 것 같은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짧게는 4분에서, 길게는 30분에 이르기도 하는 이 같은 상태가 바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또는 러닝 하이(running high)라 불리는 상태는 일종의 감정 호전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오르가즘(orgasm)의 느낌과 유사하다고 말하며, 이런 경험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율동적이며 장시간을 요하는 유산소성 운동에서 자주 경험된다고 알려져 있다. 달리기 시에는 시간과 속도에는 커다란 상관이 없으나 적어도 30분 이상의 장거리 달리기를 필요로 하며, 달리는 사람의 심적, 육체적 상태에 긴장감이 없을 때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레스를 통제하는 호르몬의 작용

러너스 하이에 영향을 준다고 알려진 물질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언급되는 물질이 엔돌핀(endorphin)이다. 엔돌핀은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통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마약인 모르핀보다 100배나 강해 체내 모르핀(endogeneous morphin) 이란 의미에서 파생됐다.

엔돌핀은 산소를 이용하는 에어로빅(aerobic) 상황에서는 별 증가를 보이지 않다가 운동 강도가 높아져 산소가 줄어드는 비에어로빅(anaerobic) 상태가 되면 급증하게 된다. 또한 인체가 고통을 겪거나,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아 기분이 나쁠 때 분비된다고도 알려져 있다. 즉 스트레스를 통제하기 위한 인체의 자기 방어 호르몬 중 하나인 것이다.

2008년에는 엔돌핀이 러너스 하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나와 화제가 됐다. 이제껏 혈장이나 소변에서 엔돌핀의 변화량만을 조사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격렬한 운동 후 뇌에서 엔돌핀 분비량의 증가를 확인한 것.

실험은 10명의 육상선수를 대상으로 2시간 장거리 달리기 전후에 뇌를 양전자방출 단층촬영 (PET)으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수행됐으며 뮌헨공과대 핵의학 헤닝 뵈커 교수팀이 주도했다.

실험을 위해 사용된 방사성 물질 ‘18F’FDPN은 뇌의 진통 물질과 경쟁적으로 아편 수용체와 결합하게 된다. 즉 엔돌핀이 많이 생성될수록 ‘18F’FDPN이 뇌속에 많이 남게 되는 것이다. 연구진은 2시간 정도 달리기 전후의 영상을 비교해 ‘18F’FDPN과 아편 수용체의 결합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이 같은 결과는 감정을 조절한다고 알려진 전두엽과 변연계에서 확인되었다.

뵈커 박사는 “우리는 최초로 엔돌핀이 러너스 하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했고, 작용하는 뇌의 영역 또한 확인했다” 라고 말했다. 운동 후 행복감과 도취감이 높아지는 이유를 뇌에서 분비된 엔돌핀에서 찾은 것이다.

뇌의 마리화나, 내인성 카나비노이드

고통을 줄여주는 물질이란 점에서 엔돌핀과 유사한 물질인 내인성 카나비노이드(endocannabinoid)도 최근 러너스 하이에 영향을 주는 물질로 주목받고 있다. 내인성 카나비노이드는 마리화나의 활성성분(THC: tetrahydrocannabinol)과 유사한 천연화합물로서 항암작용을 비롯한 통증제어, 뇌손상 복구 등 생리적 과정에 필수적인 물질로 알려져 있다.

2003년에 수행된 조지아 공대와 캘리포니아 주립대 연구팀은 두 대학에서 각각 12명씩, 총 24명의 청년에게 50분 동안 최대 심박수의 76%를 유지시키며 강도 높은 달리기, 자전거 타기 등을 시켰다. 그리고 그 후, 그들의 혈액을 체취한 결과 평소의 80% 이상의 아난다마이드(anandamide) 가 생겼음을 확인했다.

아난다마이드는 마리화나를 피울 때 환각을 일으키는 ‘THC’와 비슷한 카나비노이드의 일종이다.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 또한 운동후 느껴지는 심리적 안정감과 희열감이 마리화나를 피웠을 때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생리적인 측면과 심리학적 측면 조화되어야

2010년, 프랑스 보르도대의 연구진들은 카나비노이드 리셉터인 CBR1을 제거한 쥐의 자발적 운동에 대한 실험을 수행했다. 카나비노이드 수용체(CBR)는 주로 뇌 조직에서 발현되는 CBR1과, 면역계 조직에서 발현되는 CBR2로 나뉜다.

쥐들은 천성적으로 달리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실험에서 CB1R을 제거한 쥐들은 그렇지 않은 쥐들에 비해 30~40% 가량 자발적으로 달리는 일이 줄어들었으며, 운동에서 유도되는 해마 신경의 발생이 줄어드는 것이 확인됐다. 이는 뇌에서 카나비노이드와 결합하는 CBR1의 수준이 운동의 동기를 부여하는데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같은 실험에서 볼 때 내인성 카나비노이드는 운동의 시작과 보상에 측면에 있어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러너스 하이와 카나비노이드 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학자들의 연구는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러너스 하이는 생리적인 측면과 아울러 심리적인 영향 또한 크게 받는다. 이러한 생리학적 연구는 러너스 하이에 이르는 과정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뿐이다.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자기 만족감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즐길수록 러너스 하이를 느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