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야나, 요가 수행의 본질

<요가수트라>의 저자 파탄잘리는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한 라자 요가의 8단계를 정리했다.

라자 요가는 우리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영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요가 수행 체계 중 하나이다. 진리를 찾는 이에게 이러한 단계들은 파탄잘리가 살았던 그 시대에도 중요했던 것처럼 현재 우리가 사는 오늘날 역시 중요하다. 라자 요가의 8단계는 야마, 니야마, 아사나, 프라나야마, 프라트야하라, 다라나, 디야나, 사마디이다. 이번에는 일곱 번째 단계인 디야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요가 수련을 끝내고 사바아사나를 하고 있을 때, 그때만큼 몸과 마음이 평온한 순간이 또 있으랴?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디야나, 바로 명상이다. 디야나는 아사나에서 프라나야마로 감각을 컨트롤하는 프라트야하라, 집중에 이르는 다라나를 기반으로 한 7번째 단계이다. 디야나(dhyana)는 산스크리트어로 ‘생각’을 뜻하는 ‘dhyai’에서 유래되었다.

요가 수행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사나에 집중하고 아사나를 잘하기 위해 요가를 하겠지만, 요가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사마디라면 사마디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단계가 바로 디야나이다.

“디야나는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의식 속에 신격의 형태를 모시는 일이다.”
―프라판차사라탄트라 19, 22~23
 

“디야나란 만트라의 신성한 형태의 집중을 말한다.”
―쿠라르나바탄트라, 제17장, p.83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스트레스 없이 산다는 건 무리다. 빠르게 밀려오는 정보들부터 여러 관계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까지, 우리는 스트레스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트레스, 왜 받을까? 화가 그 원인이다. 화는 스트레스를 만들어낸다. 화의 원인을 알아보자.

첫째, 화는 나의 기대치에서 시작한다. 내가 만든 기대치는 높은데 현실은 그 같지 않으니 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화가 더 많이 쌓이고 결국 그 화로 인해 마음의 병이 생기게 된다. 다른 이가 큰 부를 축척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욕망과 기대에 차지만, 현실의 나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심지어 먹는 것까지 아껴야 하는 형편이라면 지속적으로 상대와 비교하면서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화로 인한 범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그 사건을 뉴스를 통해 심심찮게 접한다.

 

두 번째, 내가 보여준 모습에 의해 타인이 갖는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또 한번 화가 생기게 된다.

내가 보여준 모습 때문에 타인이 나에게 갖는 기대치라는 게 생기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준 기대치도 있고, 타인이 스스로 갖게 되는 기대치도 있다. 타인이 나에게 갖는 기대치가 있으면,

그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과가 좋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생기는 스트레스는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지속된다. 처음부터 기대치를 갖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겸손하게 행동하면 타인은 기대치가 없을 것이고 기대치 없는 후의 결과물이 좋게 나타나면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게 된다. 당연히 결과물이 좋지 않더라도 기대치가 없기에 걱정할 일도 없다.

세 번째, 알아차리지 못해서 생기는 화이다.

카르마 요가를 알고 있는가? 카르마 요가를 이해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된다. 모든 일의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일이 생겼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한 잘못이 무엇인지 알면 수긍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한 잘못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면 화가 생긴다. 일례로 지금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서 나에게 좋지 않은 행동을 했다면 그 이전에 원인은 나에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 말은 결국 나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명상이다. 나를 찾아가다 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 또 다른 내가 좀 더 객관적으로 떨어뜨려 나를 바라보고, 내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바라보고, 그렇게 깨닫고 알아차리면 명상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상태,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상태, 정확하게 나를 볼 수 있는 상태, 그렇게 집중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명상이 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명상이 되기 어렵다. 순간순간 알아차린다는 건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을 없애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가능해진다. 그 상태에서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행복을 얻게 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이야기이다. 어떤 나그네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당신 혹시 천사나 천신인가요? 마법사인가요? 신인가요? 당신은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부처님이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거나 부처님이 되려고 명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이나 노력으로 깨어있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일할 때, 요가를 수련 중이거나 다른 운동을 하고 있을 때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 머물러 충분히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행복하고 늘 한결같아야 한다. 과거에 머물러있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하고 집중해야 한다.

 

명상을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약한 신체를 지녔거나 굳은 근육, 일그러진 척추, 동요하는 마음, 흥분 등의 소유자는 참된 명상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참된 명상을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라자 요가의 8단계 중 야마, 니야마, 아사나, 프라나야마, 프라트야하라, 다라나의 사전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혹시 못 본 분들은 <요가저널> 과월호들을 살펴보자.)

그런데 혹여, 명상을 할 때만 깨어있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요가를 수련하는 동안 자세를 바르게 하면 우리의 몸은 분명 시원하고 편안하며 건강해진다. 하지만 평상시 자세가 좋지 않으면 또 다시 불편하고 통증이 생긴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명상을 하는 그 순간만 알아차리고 현실로 돌아가서 알아차림을 못 한다면 마음에 통증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요가에서도 삶에서도.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도 깨어있어야 한다. 요가 수행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명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출처 : 요가저널코리아(http://www.yoga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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