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정애착
딸아이가 26개월 즈음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가려고 외출 준비를 하다가 그만 아이가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게 되었다. 한번도 혼자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없는 아이가 그 안에서 얼마나 무서울지, 혹시 엉뚱한 곳에 내려서 헤매지나 않을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는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지수야, 엄마 아빠가 곧 갈게!”라고 외치며 계단을 급히 내려갔는데 다행히 아이는 1층에서 어떤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다소 긴장한 눈치였지만, 엄마 아빠를 보자 환한 얼굴로 달려가 안기며 그동안 자신을 봐줬던 언니에게 손을 흔들고 작별인사를 하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그 뒤에도 아이는 다행히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잠시 혼자 있게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후 아이에게 엘리베이터 사건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때 엄마는 정말 깜짝 놀랐어. 혹시 네가 무서워하면 어떡하나, 혼자 헤매고 다니면 어떡하나 해서”라고 말하자, 딸아이는 “엄마가 올 거잖아? 그리고 길을 잃으면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텐데 뭐, 그치, 엄마?”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부모에게 신뢰감을 느끼고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에 대한 신뢰감을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으로 확대시킨다. 애착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 엄마와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는 이후 다른 어린들이나 또래와 잘 사귀고,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주고받으며 협동하는 놀이 활동에도 잘 참여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공감능력도 잘 발달되어 다른 아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달래줌으로써 또래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다. 이렇듯 안정적인 애착 관계는 아이의 긍정적인 대인관계와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2. 불안정-회피적 애착
32개월 된 영수는 이름을 부르자마자 엄마 손도 잡지 않고 치료실로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엄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혼자서 장난감이 놓여 있는 선반을 살펴보더니 자동차와 공룡을 꺼내 이리저리 굴리고 늘어놓으며 놀기 시작했다. 엄마가 “영수야! 여기 블록 있다!”라고 부르면 잠시 흘낏 쳐다보고 다시 자신의 놀이로 돌아갔다. 엄마가 나가고 작업치료사가 그 옆에 앉자 영수는 그를 잠시 쳐다보고는 다시 자기 놀이를 했다. 엄마가 없는 것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곧 엄마가 들어와 “영수야, 엄마 왔어!”라며 영수 곁으로 다가와 몸을 만지려 하자 아이는 흠칫 놀라는 것 같더니 몸을 빼며 엄마의 손길을 피했다. |
‘불안정-회피적 애착’을 보이는 아이들의 부모를 보면 대부분 아이와 친밀하지 못하고 거리감이 있으며, 아이를 자주 거부하고 밀어내는 행동을 한다.
앞선 예에서 나온 영수의 엄마도 아이에게 자주 짜증과 화를 내곤했다. 산후풍 때문에 영수 엄마는 늘 몸이 쑤시고 쉽게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아이가 놀아달라고 다가오면 짜증부터 내면서 “아휴 지겨워!”라고 말하며 아이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제발 엄마 좀 귀찮게 하지마!”라고 소리치며 밀쳐낸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영수는 혼자 놀기 시작했고,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슬쩍 자리를 피하기도 했으며, 짜증내고 화내는 엄마 대신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는 장난감에 집착하면서 회피적인 애착을 보이게 되었다.
이런 애착을 보이는 아이들은 “낯선 상황 절차”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보다는 장난감이나 사물과 같은 무생물 대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이는 엄마를 필요로 하지만 엄마가 그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니까 엄마를 비롯한 사람들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거부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느끼며 상처를 받았으므로 차라리 감정이 없고,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물이 자신을 더 편하게 해주고 안정시켜준다고 느낀다.
어린 시절 부모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자란 ‘불안정-회피적 애착’의 아이는 이 넓은 세상을 홀로 맞서 살아야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때로는 동굴로 숨어들어 외톨이가 되기도 하고, 절망감에 마구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공격자가 될 수도 있다.
3. 불안정-저항적 애착
상담센터를 찾아온 네 살 건우의 엄마는 아이가 놀아달라고 할 때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놀아주지 않거나 시큰둥하게 그냥 옆에 않아 있곤 했다. 그러다가 건우가 혼자서 열심히 블록놀이를 하고 있으면 갑자기 악어 인형을 들고 와서는 “잡아먹겠다”면서 아이가 만들어놓은 블록을 부수기도 하고, 바닥에 놓인 파리채를 들고 잘 놀고 있는 아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재미있다고 웃기도 했다. 엄마의 장난에 화가나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나 기분 안 좋아!”라고 씩씩거리면 엄마는 화를 내면서 “엄마한테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야”라고 혼을 냈다. |
‘불안정-저항적 애착’을 가진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의 욕구와 기분에는 상관없이 본인이 원할 때는 아이에게 잘해주고 놀아주다가 또 본인이 싫을 때는 아이를 거부한다. 이러다 보니 아이는 부모란 자신이 필요로 할 때 이용하거나 도움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부모란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한마디로 ‘예측불허’의 대상이므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불안감과 불안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불안정-저항적 애착’을 보이는 아이들은 자라서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당황하며 좌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4. 불안정-와해·혼돈형 애착
아홉 살 현준이는 똘망똘망하고 잘생긴 남자아이다. 처음 만났을 때 말도 잘하고 어른들에게도 싹싹하게 행동해서 예쁨을 받을 만한 아이가 왜 상담을 받으러 왔나 이상할 정도였다. 상담센터를 방문한 이유는 흥미롭게도 이제 아홉 살밖에 안된 아이가 선생님이 지적하면 반항하고, 멋대로 학원을 빠지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현준이는 복잡한 가정사가 있는 아이였다. 아빠는 알코올의존증으로 술만 마시면 주사가 심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아내와 아이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술 때문에 직장에서도 자주 쫓겨나 생계는 엄마의 차지였다. 일하러 나간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현준이를 돌봐야 할 때가 많았는데, 술을 먹지 않고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는 아이와 놀이터에 나가 신나게 놀아주거나 집에서 함께 레슬링과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다시 폭언을 남발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곤 했다. 현준이가 기억하는 정말 무서운 사건은 아빠가 술을 잔뜩 마신 후 자고 있던 현준이와 엄마를 깨워 한밤중에 ‘드라이브를 가자’면서 차에 태우고 과속 질주를 했던 일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현준이에게 아빠는 떠올리면 두렵고, 그래서 아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
앞서 소개한 현준이처럼 '불안정-와해·혼돈형 애착'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때로 위안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스트레스의 제공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가 방심하고 있을 때 예상치도 못한 강한 위협과 공포를 제공한다. 이 아이들에게 부모란 아이가 놀라거나 두려워할 때 달래주고 보호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겁주고 무섭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들의 80% 이상이 ‘불안정-와해·혼돈형 애착’을 보이고, 알코올의존증, 조울증, 우울증처럼 기분이 들쑥날쑥하고 감정이 폭발하는 기분장애를 겪는 부모, 혹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며 스트레스가 많은 경우도 자녀한테서 이런 ‘불안정-와해·혼돈형 애착’이 자주 발견된다.
좀 더 커서는 산만하거나 반항적인 문제행동을 일삼기도 하는데, 실제로 행동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80%정도가 이런 애착 유형에 속한다. 하지만 문제행동보다도 이런 애착 유형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타인과 친밀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이런 아이들에게 친구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기 때문에 평생 외로움 속에 살아가야 하는 불행이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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